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사르의 내전 (문단 편집) === [[디라키움 공방전|디라키움 포위]] === 한편 카이사르는 자신의 함대를 오리쿰에 정박시키고 3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내전이 끝난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동생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끊임없이 저항하였으나 히스파니아에서 패배한 뒤 마침내 붙잡혀 처형된다. 하지만 섹스투스는 계속 살아남아 훗날 카이사르 암살 뒤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면서 아우구스투스를 위협한다.] 그나이우스는 우세한 병력으로 전방위를 동시공격하고 병력을 끊임없이 교체하면서 괴롭혔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병력은 버티지 못하여 후퇴하고 그곳을 장악한 그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함대를 모두 불태운다. 한편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가 주둔한 곳을 향해 이동한다. 이곳에서 진영을 구축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포진한 뒤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의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병력으로만 본다면 훗날 파르살루스 회전 때보다 폼페이우스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합류한 안토니우스의 병력을 모두 쪼개 각지에 파견하였으므로 초기 2만여 남짓의 병력만 있을 뿐이었고 폼페이우스는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이 부족하여 대략 4만여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회전을 치르는 것을 거부한다.] 폼페이우스가 교전를 거부한 것은 카이사르군이 매우 정예한 병력인 데다 이탈리아로부터 차단된 채 고립된 카이사르를 상대로는 지구전으로 가는 것이 더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가 꼼짝도 않는 것을 본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디라키움을 포위하기로 하였다. 디라키움이 포위되면 폼페이우스의 진영과 디라키움 사이의 보급라인이 차단되므로 그는 진에서 나와 군을 이끌고 지름길로 디카리움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진영을 차린다. 이튿날 도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의 진영을 보고 그 앞에서 진영을 구축한다. 폼페이우스는 이때 언덕 위에 진영을 구축하고 그 배후에 배로 접근할 수 있는 해안을 확보해놓았다. 그 뒤 해로를 통해 보급을 하도록 명령한다. 그 앞에 진영을 지은 카이사르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각지에 병력을 파견하나 폼페이우스가 이를 내다보고 미리 인근 식량을 모두 징발해버렸기 때문에 식량난을 겪게된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카이사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이는 자신의 병력으로 폼페이우스의 진영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에겐 다수의 기병이 있으므로 포위를 해놓는다면 기병의 말꼴이 차단될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자신의 병사로 식량을 수거하는데 폼페이우스 군의 습격을 예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에게 카이사르군의 우세를 과시하여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참호를 파고 망루를 세우는 공사를 폼페이우스 진영 부근에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의 참호건설을 방해하고 싶었으나 그의 병력과 카이사르 병력의 전투력 차이가 워낙 커서 병력을 내보내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진영을 옮기는 것도 디카리움을 수비해야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했으므로 그도 병사를 내보내 그의 진영을 넓히는 공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양군은 서로 대치하면서 한쪽은 포위 공사를, 다른 쪽은 진영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러다 보니 두 부대는 소규모의 충돌을 자주하였다. 폼페이우스에겐 궁수와 투석병이 많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과 충돌할 때마다 이들을 동원해 카이사르군에게 많은 부상을 입힌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9군단이 한 고지를 점령하였는데 이 곳은 폼페이우스 진영 쪽으로 돌출된 부분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무모한 카이사르군의 움직임을 비웃으며, > 만일 카이사르 군단이 무리하게 점령한 고지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고 물러난다면 나를 무능한 총사령관이라고 불러도 좋다. 라고 말하며 궁수와 투석병으로 언덕 위를 에워싼 뒤 마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9군단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무기에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를 본 폼페이우스는 병력을 보내 추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병력을 동원해 언덕의 퇴각로에 간이 차단막을 세운 바가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군이 이곳을 넘어 공격해 들어오자 9군단은 적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전투력에서 밀린 폼페이우스군이 후퇴하자 9군단은 그 틈을 타고 모두 안전하게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공사를 진행한 뒤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카이사르의 포위망은 26킬로미터였고 폼페이우스군의 포위망은 23킬로미터였다. 이런 엄청난 거리를 2만여 남짓의 병력으로 지키는 것은 카이사르군이 정예라 하나 상당히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포위를 하였음에도 폼페이우스는 끊임없이 선박이 보급품을 날라왔으므로 포위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지 않았다. 반면 카이사르군은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카이사르군의 병사가 카라라 불리는 식물 뿌리를 빵으로 만들어 우유와 섞어먹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이러면서 버티기 시작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 '빵'을 직접 본 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싸우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량난을 폼페이우스군이 비웃자 카이사르 측 병사들은 이 빵을 폼페이우스군 진영으로 집어던지는 것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축을 잡고 보리와 푸성귀를 먹는 등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으면서 견뎌냈다. 그 뒤 계절이 바뀌어 곡식이 무르익기 시작하자 카이사르군에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포위된 열악한 환경에서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으며 또한 말꼴을 배로 보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모든 가축을 도살하는 등의 곤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가 있는 곳의 물길을 전부 차단해 놓았으므로 물 부족의 곤란을 겪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폼페이우스는 마침내 카이사르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우선 자신의 기병을 일부를 배에 싣고 디라키움 쪽으로 하선시킨다. 그 기병은 디라키움과 카이사르 진영의 길목에 매복하였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 진영에 소문을 내게 하는데 즉 폼페이우스 진영 바로 옆에 있는 도시 디카리움이 카이사르 쪽에 붙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잠시 진영을 떠나 디카리움 성으로 향하자 카이사르가 본진에서 떠났다는 첩보를 들은 폼페이우스는 즉시 병력을 총동원해 공세에 나선다. 특히 카이사르 진영의 한 보루에는 250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곳에 폼페이우스는 무려 4개 군단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띄운다. 그와 동시에 폼페이우스는 1개 군단으로 다른 요새를 공격하는 한편 다른 군단병들로는 카이사르의 게르만족 부대가 지키는 요소를 공격하였다. 또한 디카리움에서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진영을 떠날 것을 예상하고 그 지역에 기병을 미리 몰래 보내 매복해놓았는데 카이사르가 이 매복에 걸려든 것이었다. 이때의 교전은 세 번에 걸쳐 벌어졌다.[* 이 대목은 내전기에서 소실된 부분이므로 학자들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세 번의 교전은 카이사르가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이 싸움에서 카이사르군은 사력을 다해 폼페이우스를 격퇴한다. 250명이 지키는 보루에서는 백인대장 스카이바가 맹활약을 하여 무려 4시간동안이나 4개 군단병의 맹공을 견뎠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부장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이 사람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조카인데 카이사르편에 붙었다. 반대로 카이사르의 일족인 루키우스는 폼페이우스편에 붙었다.]가 2.5개 군단을 이끌고 당도하자 폼페이우스군은 물러난다. 그리고 다른 두 요새에서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매복에 걸려든 카이사르 역시 교전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그날 하루 동안 무려 6번의 교전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 결과 폼페이우스군은 2천의 전사자를 내었고 카이사르는 20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나 모든 요새의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이때 백인대장 스카이바의 방패에는 무려 120발의 화살이 박혔으며, 그는 눈에 화살을 맞자 항복하려는 척하다가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다가온 두 명의 적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용맹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그를 치하하며 무려 2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하사한다.[* 대략 1[[세스테르티우스]]는 대략 2달러로, 한화로 약 4억여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스카이바는 이후 다시 언급되지 않으나, 훗날 갈리아 보조병 기병대 중 '스카이바 기병연대'라는 부대가 존재한 것으로 볼 때 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진급한 것으로 보인다.] 포위망 돌파가 무산된 뒤 폼페이우스는 병력을 참호 뒤로 철수시켰다. 카이사르는 그 뒤 병사를 포진하여 회전을 치르자는 의사를 표시했고 폼페이우스는 자신도 병력을 포진하긴 했으나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 그러는 중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2개 군단이 마케도니아 국경 내에 진입하였다. 스키피오는 마케도니아를 두고 도미티우스와 대치하였으나 카이사르와의 싸움이 더욱 급하다고 보고 이곳을 포기한 채 폼페이우스와 합류하러 온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스키피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의 중재를 요청했고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스키피오는 이에 흔들렸으나 곧 동료의 책망을 받아 사절을 거부하였다. 그 와중에 마침내 폼페이우스군의 말꼴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말들이 쇠약해지자 폼페이우스는 다시 한 번 포위망을 뚫으려는 시도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때 갈리아 기병의 장교들 중 두 형제인 로우킬루스와 에구스가 있었는데 이들이 기병들의 봉급을 횡령하였다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카이사르 밑에서 오랬동안 종군한 이들로 카이사르가 매우 신임하여 이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등록시켜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횡령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그들을 막사로 불러 꾸짖고 훈계하였다. 이 정도로 그친 것은 전쟁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카이사르가 이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나 이 일로 인해 카이사르군 내에서는 이 두 형제를 비웃게 되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이들은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가길 결심하고 우선 기병 사령관 볼루세누스[* 볼루세누스는 갈리아 전기 8권에서 등장하여 맹활약하던 인물로 마지막 부분에서 허벅지의 심한 부상을 입은 뒤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상처를 치료한 뒤 복귀하여 기병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재등장을 보면 얼마만큼 카이사르군이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던 베테랑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짐작가능케 한다.]를 암살한 뒤 그의 목을 가져가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볼루세누스에게로 접근하는게 매우 어려웠으므로 이들은 병사들에게 돈을 최대한 빌리고 말을 구입한 뒤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이들을 맞이한 폼페이우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우선 이 두 기병장교들을 자신의 진영 내 곳곳을 다니게 하여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여지껏 카이사르 쪽으로 넘어간 탈주병은 있어도 카이사르쪽에서 폼페이우스측으로 넘어간 이들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둘은 일반 병사가 아닌 높은 신분의 기병 지휘관이자 원로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이런 신분을 가진 탈주병은 폼페이우스 측에서조차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 두 장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중대한 군사기밀을 알려준다. 이들은 모든 군사 전문가를 알고 있었고 초소의 배치, 지형, 지휘관의 성격을 모두 꿰뚫고 있었으며 또한 군인들의 일과표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정보를 전해들은 폼페이우스는 포위망 중 가장 약한 부분인 바다쪽의 9군단이 포진한 지역을 집중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 중 6개 군단에게 버드나무로 투구위를 덮게 한 뒤 본인이 직접 이들 6개 군단을 이끌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 포위망의 배후로 몰래 이동한다. 카이사르는 일찍이 이 포위망을 건설하였을 때 바다 건너의 공격을 예상하고 이중 포위망을 설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 포위망은 완성이 되지 않았었고 따라서 확실히 취약한 부분이었다. 이날 밤 새벽에 폼페이우스의 6개 군단이 이 방어벽을 돌파하기 위해 배후에 등장하였고 또한 나머지 군단병들이 전방에 나타났다. 9군단은 이들에게 투석을 하면서 저항했으나 이미 폼페이우스군은 버드나무 덮개로 투구를 쓰고 있었으므로 무용지물이었다. 9군단에 접근한 폼페이우스군은 엄청난 수의 궁병과 투석병으로 화살과 돌을 날려댔고 이들이 완성되지 않은 포위망에 몰려들기 시작하자 9군단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침내 9군단은 이 지역을 포기하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이때 마침 재무관이자 9군단의 군단장을 맡은 마르켈루스[* 로마 시대 재무관이면 대대장 바로 다음의 위치로 20대 중후반의 젊은이가 맡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군단장을 맡기엔 이른 나이였다.]가 몇개 대대를 이끌고 당도했으나 9군단의 공포가 워낙 심해 이들도 전염되어 같이 패주한다. 폼페이우스군은 추격하면서 많은 수의 카이사르군을 살해하였고 그 결과 6명의 백인대장 중 5명이 전사하고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는다. 승세를 탄 폼페이우스군은 계속 추격해 마르켈루스의 본진까지 몰려온다. 그런데 곧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군단이 당도하자 폼페이우스군은 추격을 멈추었고 카이사르까지 당도하자 폼페이우스는 철수한다. 비록 폼페이우스군은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했으나 그들이 공격한 초소는 점령당하고 포위망의 한쪽이 완전히 뚫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폼페이우스는 즉시 기병을 이 포위망 밖으로 모두 내보내 들판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다.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푼 뒤 폼페이우스군과 나란히 진영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진영이 건설되는 중 카이사르에게 정찰병이 귀환해 보고하길 숲 뒤편에 1개 군단이 행군 중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카이사르가 과거에 짓다가 말고 버린 진영을 점거하러 행군한 것이었다.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부터 7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면 전날의 패배를 다소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3.3개 군단을 이끌고 몰래 접근한 뒤 이들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이들은 금세 밀려 진영안으로 밀려들어갔고 카이사르군은 이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진영 안의 진입을 시도한다. 하지만 뚫리면 끝장이라는 것을 안 이들도 문앞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이들은 곧 다른 울타리를 깨부수고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 폼페이우스의 1개 군단은 카이사르군에게 계속 살해당하였다. 이렇듯 성공이 눈앞에 있을 때 불운이 찾아왔다. 기병으로 구성된 카이사르군의 우익은 이들의 진영에 진입하려고 이 진영의 벽을 따라 기동하면서 출입구를 찾았다. 하지만 출입구는 보이지 않았고 이 벽은 계속 이어저 해안가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병은 벽을 따라 우회하다 마침내 출입구를 찾아내어 벽을 넘어 진영안으로 들어간 뒤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한다. 그는 기병을 모두 동원한 5개 군단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엄청난 규모는 곧바로 카이사르의 우익인 기병대의 눈에 띄었고 이들은 즉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우익의 기병대가 도망가자 변고가 일어남을 안 카이사르의 군대는 모두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다시피 하던 기존의 폼페이우스 군단도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이들은 심지어 카이사르군을 향해 돌격하는 배짱까지 보였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카이사르군은 모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퇴각은 매우 황급하였으므로 3미터 방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그 뒤 뛰어내린 병사에게 짓밟혀 죽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카이사르는 도망치는 이들에게 직접 나가서 꾸짖으며 도망치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도망가는 기수의 깃발을 움켜쥐고 멈추라고 외치기까지 했으나 기수들은 카이사르가 움켜진 깃발을 내던지고 다른 기수들 역시 깃발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멈추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 이때 카이사르군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냐면, 심지어 도망치던 한 기수가 자신의 앞을 막는 카이사르를 날카로운 깃대 끝으로 찌르려고 해서 호위병이 칼로 그 기수의 팔을 베어버려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카이사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폼페이우스는 그를 추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카이사르군이 공격한 장소가 좁은 문과 방벽을 넘어 공격한 것이었으므로 기병대가 추격하기엔 좁은 문과 방벽을 넘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폼페이우스는 추격이 불가능하였으며 따라서 카이사르군은 전면전익 패주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번의 교전으로 1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포위전은 완벽한 패배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